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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과 검정의 얼굴로부터

«포커스(FOCUS)»
지민경
프린트 베이커리 갤러리
2022.12.08-12.28

0.  태초의 검정

감은 눈 속 깜깜함에는 미세한 밝음이 가라앉는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의 표면 위에 만연한 빛을 알지 못한다. 검은 무언가를 비집고 들어오는 반짝임에서 비로소 빛을 본다. 이때 검은색은 빛의 이면 또는 빛을 덮는 어둠이 아닌 “빛의 바탕”1) 이자 그 시초에 자리한다. 모든 시작의 시작점으로서 검정은 먼 우주에서부터 우리의 눈꺼풀 아래까지 닿는다.

 

수묵 작업을 이어온 지민경에게 검정은 태초의 기억으로부터 오늘 걸어온 강변의 시간을 잇는색이다. 나아가 숱한 출발점이 담긴 주머니를 상징한다. 씨앗과 자궁, 동이 트기 전 하늘의 검정은 삶의 곳곳에 이런저런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작가는 이러한 ‘복수의 검정’을 나타내기 적절한 재료로서 먹을 다룬다. 다양한 먹의 농담은 씨앗을 뿌리듯 미색의 한지 위에 흩뿌려진다. 전시 «포커스(FOCUS)»는 지민경이 그려온 검정의 풍경을 조명하며 그동안의 작업과정을 아우른다.

 

 

1-1. 시작과 끝의 얼굴

지민경에게 그림은 매일 새벽 진주 남강을 걷는 일처럼 일정한 시간 단위 동안 변함없이 계속되는 의식이다. 반복 속 얼굴을 형상화하는 검정은 시작과 끝, 끝에서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오며 마주하는 것들을 내포한다. 이를테면 그는 어릴 적 검은 기름이 깊게 배어 있던 아버지의 손과 먹으로 얼룩진 자신의 손을 함께 본다. 자동차를 고치던 아버지의 손, 그림 그리는 자신의 손은 부녀의 얼굴처럼 어딘가 닮아 있다. 얼룩은 멍이나 상처의 흔적과도 같은 모양을 한다. 작가는 화선지와 먹으로 마음을 달래던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붓과 솔을 들어 한지 위에 긋는다. 나를 구원하는 것과 내가 구원할 수 있는 작은 세계가 빈 종이 위를 채운다. 이제 그림의 표면을 더듬는 붓질은 이들을 향한 간절한 기도처럼 다가온다.

 

근원으로서의 구체(球體) 안에는 자연의 요소들이 깃들어 있다. 꽃의 수술, 나비의 솜털은 눈의 자리에서 깜빡인다. 얼굴 중심에 곧게 뻗은 선은 코를 닮아 있고, 더 아래 위치한 굴곡은 산과 호수의 형태를 본뜬 듯 하다. 작가는 이처럼 단순한 기호를 통해 세계의 복잡한 규칙을 들여다본다. 화면 속 생명이 지닌 에너지와 잠재력은 고요하지만 과감한 필치를 통해 생의 기운을 밝힌다. 자연물로 비유되는 눈코입은 원 안쪽을 조화롭게 채우며 ‘자연스러운’ 풍경을 이룬다. 얼굴은 그 자체로 자연의 일부이자 전체가 된다.

 

 

1-2. “무한한 것과 작은 것”2)

    풍경과 얼굴을 겹쳐 보는 일은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층위를 하나의 평면 위에 덧씌우는 일과 같다. 무한한 우주가 이룬 풍경과 작은 생명으로서의 얼굴은 멀리, 또 가까이에 있다. 관객과 맞닿은 시선은 가만히 바깥을 응시한다. 산수에는 보는 이의 얼굴이 투영되고, 얼굴에는 서로 마주보는 눈이 놓인다. 한지 위에 물든 검정이 또렷한 눈동자에 비친다. 작가는 대상과 나 사이에 발생하는 개별적 시간이 ‘보는 행위’를 그 본질에 가깝도록 만든다고 믿는다. 얼굴과 얼굴, 풍경과 얼굴 사이의 ‘봄’은 흰색과 검은색의 경계를 흐리며 회색의 지평을 연다.

 

 

0’. 아침에 뜨는 별, 검정의 지속

   “이 둥근 풀밭에 우리는 함께 앉았다. (…) 이제, 풀과 나무들은 허공을 날다가 얼마 안되어 다시 돌아오고, 나뭇잎을 흔들다 다시 내려 두는 바람, 그리고 양팔로 무릎을 안고 빙 둘러 앉아 있는 우리는 어떤 다른 질서를, 영원한 대의명분을 만들어내는 더 나은 질서를 암시한다. 이것을 한 순간 마음의 눈으로 보고 오늘 밤 언어로 고정시키자. 두드려서 강철 반지로 만들어 보자.”3) 


  지민경은 짙은 초록이 겹쳐 그림자진 나무의 뒷모습, 지평선과 하늘 사이에 드리워진 빛의 순간을 마음의 눈으로 본다. 가장 어두운 검정을 뚫고 나오는 태양은 그러나 “아침에 뜨는 별”[4] 에 지나지 않고, 다만 어둠이 있을 뿐이다. 끝내 다시 마주하는 검정, 도래하는 어둠은 빛이 생성되는 곳이자 사라진 흔적을 품는 장소가 된다. 그림으로 고정된 순간은 검정의 지속을 연장시킨다. 얼굴을 가진 것들, 날개를 달고 건네다 보는 마음이 여기에 남는다.

 

1)  검은색에 관한 알랭 바디우의 단상에서 인용한 말이다. 바디우에게 회화로서의 검정은 재현된 이미지의 검정, 언어로 기입된 검정이 아닌 ‘빛의 바탕’으로 기능한다. 알랭 바디우, 박성훈 역, 『검은색: 무색의 섬광들』, 민음사, 2020, p.52.
 

2) 작가는 진주 남강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을 “무한한 것과 작은 것의 경계에 서있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3)  버지니아 울프, 박희진 역, 『파도』, 솔, 2019, p.44.

4)  헨리 데이빗 소로우, 강승영 역, 『월든』, 은행나무, 2021, p.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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