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URI»
협력기획ㆍ비평
안태원 개인전
총괄기획ㅣ김윤익
P21
2024.06.29-08.10
안태원의 작업에 관한 소고: 이미지의 뿌리를 찾아서
소급하여 바라보기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이미지1) 가 되기 시작한 이래로, 모든 이미지는 손에 잡힐 듯한 무언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보자. 우리 몸처럼 실재하는 공간을 차지하는 모든 것들은 점점 더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납작한 이미지-회화, 아날로그 사진, 디지털 이미지-가 되어왔다. 반대로 납작한 이미지는 어쩌면 그것이 납작하고 매끄러운 무언가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보다 훨씬 더 짧은 시간 내에, 다시 손에 잡힐 듯한 무언가-다시 회화(의 환영), 3D 이미지, VR 이미지-가 되어왔다. 서로 반대 지점을 향하는 두 흐름이 시각매체의 발전 위에서 평행하게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 분기점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안태원의 작업을 지켜보며 이러한 생각을 늘어놓게 된 이유는, 최근 그의 작업이 특정한 작용점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반대를 향해 가는 팽팽한 힘의 작용 가운데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맞서는 힘의 양쪽 끝에는 각각 평면과 입체, 회화와 조각, 이미지와 사물이라는 대립항이 자리한다. 네모난 캔버스에 얇은 물감층을 얹어가며 분명한 평면-회화-이미지를 생산했던 그의 작업이 입체-조각-사물에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단순히 그의 시도가 평면에서 입체로 향해가는 어느 지점에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진 작업들은 그 지점을 몇 번이고 넘어서거나 되돌아가며 쉽게 단정짓기 어려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를테면 조각과 비슷한 조형물을 만들면서도 회화적 요소를 집요하게 끌고 가거나, 디지털 이미지를 기반으로 축적해 나가던 회화의 소재를 돌연 현실 속 대상으로 바꿔버리는 식의 행보였다. 한동안 갈래를 잡지 못하던 중 깨닫게 된 것은 안태원이 자신의 작업을 고정된 ‘상태’가 아닌 진행 중인 ‘상황’에 놓인 유동적인 대상으로 여긴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특정 매체를 의식하여 이루어지기 보다 해당 시점에 상응하는 요소들을 더하거나 빼는 등의 가변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이끄는 작용점에는 ‘인터넷’이 있었다. 인터넷은 안태원이 자라온 환경 자체이자 모든 매체를 감각하고 출력하는 단계에 경유하는 일종의 필터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가상의 것을 포괄하는 동시에 실재하는 모든 것을 연결하는 인터넷은 그가 앞서 언급한 두 대립항의 긴장 속에서 작업을 지속케 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렇다면 안태원의 작업이 현재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과정을 거쳐왔는지 소급하여 살펴보는 일은 곧 그의 작업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맺어온 세계와의 관계를 소명하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보여지는 것을 그리기
안태원의 초기 작업은 인터넷에 떠도는 밈(meme) 이미지를 수집하여 캔버스의 평면 위로 옮겨내는 완전한 회화의 형식을 취했다. 밈은 불특정 다수에 의해 알 수 없는 경로와 방식으로 복제되어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 등지로 퍼져 나가는 유행 또는 유행의 대상을 가리킨다. 마치 스스로 증식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복제, 변형되는 밈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2) 따라서 밈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많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복제되고 노출되었는지의 여부이다. 즉 이미지의 결과값이나 내용보다 이미지가 생성되고 퍼져 나가는 방식에 그 방점이 있다. 그러나 안태원이 처음에 주목한 것은 밈의 역학보다 밈에서 표면적으로 볼 수 있는 이미지 자체였다. 그는 금방 휘발되고 말 디지털 이미지를 캔버스에 그려내는 과정에 즐거움을 느꼈다. 이는 자칫하면 가상에 존재하는 평면의 이미지를 실제로 존재하는 또 다른 평면에 옮기는, 얇은 층위의 작업으로 이해되기 쉽다. 하지만 안태원에게 디지털 이미지가 현실에 실재하는 다른 어떤 사물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감각적 자극의 강도와 빈도가 현실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수준이라는 사실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공감할 테다. 그렇다면 이때 밈 이미지와 평면의 회화 중 ‘납작한 이미지’에 가까운 것은 어느 쪽이 될까? 혹은 디지털 이미지와 회화의 ‘캔버스’ 중 어떤 것이 더 ‘사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Far away, 237x118cm, acrylic on custom canvas, 2021

Guardian, 100x214cm, acrylic on custom canvas, 2021

보고자 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보여지는 것, 끊임없이 주어지고 쏟아져서 보게 되는 것. 굳이 ‘보이다’라는 피동사 뒤에 피동의 뜻을 나타내는 ‘-어지다’를 중복해서 사용한 까닭은 디지털 이미지를 쉴 새 없이 마주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안태원에게 밈 이미지가 사물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보는 또다른 이유에는 그가 밈을 그리며 활용했던 변형 캔버스 작업이 있다. 어느 순간 안태원은 밈을 담아내는 캔버스의 형태 자체를 변형했다. 투명한 창과 같이 네모난 캔버스에 옮겨지던 밈이, 사물의 흔적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변형 캔버스의 표면으로 옮겨간 것이다. 특히 <Far away>(2021)나 <Guardian>(2021) 같은 작업의 경우, 고양이 밈의 왜곡된 형태를 강조하는 모양의 캔버스를 활용하거나, 꼬깔콘 이미지의 형태를 누끼 딴 듯 그대로 도려냄으로써 디지털 이미지가 가진 이질적인 현실감을 극대화했다.
여기까지 보았을 때, 나는 안태원이 기존에 쌓아 둔 밈 이미지의 데이터와 작업 방식을 좀더 밀어붙여 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밈 그리기를 멈추고, 현실의 고양이를 그리기 시작한다.
보고자 하는 것을 그리기
버려진 아기 고양이었던 ‘히로’를 집에 데려온 뒤로, 안태원은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던 시간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이제 그가 자신의 현실과 가장 달라붙어 있다고 여기는 것은 히로가 되었다. 작업에 인터넷 밈이 아닌 실존하는 고양이 히로가 등장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디지털 이미지로 가득했던 현실에 히로가 등장하면서, 작업의 소재와 방식에도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안태원이 초기 작업에서 밈이 가진 어법보다 표면적인 이미지에 천착했던 이유는, 이미 그 어법이 충분히 체화 된 상태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여지는 것이 아닌 보고자 하는 것, 보고 싶은 것을 그리기 시작한 때부터, 그는 끊임없이 복제되고 증식하는 디지털 이미지의 속성을 작업에 그대로 적용한다. 히로를 찍은 사진을 밈처럼 아무렇게나 변형, 왜곡시킨 뒤 여러 형태의 표면 위에 ‘복제’하는 방식이다(<Hiro is everywhere> (2021-)). 여기서 ‘여러 형태’란 이즈음부터 평면 작업과 함께 만든 비정형적인 형태의 입체물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러 형태의 표면’인 이유는 캔버스의 표면에 에어브러쉬를 분사하여 그리던 방식을 입체 조형물에도 똑같이 적용했기 때문이다. 완전히 평평한 표면인지, 굴곡이 있는 표면인지의 차이, 혹은 그림의 밑작업에 어떤 사물이 채택되었는지의 차이를 가질 뿐이었다.
Hiro is everywhere, 50x58.5x66cm, acrylic on resin, 2021

마지막으로 이 시기를 거치며, 안태원은 에어브러쉬를 활용한 사실적인 묘사를 보다 단련하게 된다. 디지털 이미지의 매끄러운 특성을 옮겨내기에 적합했던 에어브러쉬는 현실의 히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에도 더없이 적합한 재료가 되었다. 왜곡된 형태와 별개로 히로의 이미지는 현실의 히로와 계속해서 닮아가게 된다. 그럼 여기서 다시 질문. 더이상 평면이 아닌 조각의 형태를 하고 있음에도 안태원이 몰두하는 것이 조각의 ‘표면’이자 덧씌워지는 ‘이미지’라면, 그의 조각은 조각임에도 불구하고 평면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을까? 안태원은 왜 이렇게까지 사물의 표면에 집착하는 것일까?
평면-회화-이미지이자 입체-조각-사물인 것: 《뿌리 PPURI》(2024)
《뿌리 PPURI》(2024) 전시 전경 (사진ㅣ최철림)
《뿌리 PPURI》라는 제목의 이번 개인전은 안태원의 정체성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 인터넷이 과연 현재 시점의 작업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에 주목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입구를 마주보고 가장 안쪽 벽에 걸린 200호 크기의 캔버스 작업 <Hip Check>(2024)이다. 어떤 생물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왜곡된 형태의 히로 이미지가 안태원이 최근 시도하고 있는 독특한 질감의 표면 위에 안착해 있다. 그리고 이 그림을 중심으로 전시장 곳곳에는 총 12점의 입체 조형물이 배치되어 있다. 안태원은 여전히 실재하는 히로와 자신의 물리적인 형상을 조형물의 ‘표면’ 위에 그린 ‘이미지’로 옮겨내려 하는 것 같다. 다만 조형물은 조각이 되기 위해 조각의 덩어리를 이식 받은 이미지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새 작업이 바로 좌대이다. 안태원은 각각의 조형물들이 놓일 좌대를 직접 제작했는데, 이는 여전히 이미지의 속성을 띠고 있음에도 조각의 덩어리를 가진 것들을 지지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인다. 좌대는 자립하지 못하는 덩어리, 즉 불완전한 상태에 놓인 이미지-조형물이 점차 조각이 되고 있는 ‘상황’을 지탱한다.

Hiro is everywhere, 21.7x31x31.4cm, acrylic on epoxy, 2024 (사진ㅣ최철림)
한편 이번에 전시된 조형물에는 그 표면을 얇고 촘촘하게 파낸 조각적 제스처가 더해져 있다.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조형물에 작업의 층위를 한 겹 더한 것인데, 여기에는 상당한 노동이 들어간 듯하다. 안태원은 완성된 조형물의 피부를 벗겨냄으로써 이미지의 안쪽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는 시각적 효과를 위한 것이기 보다, 이미지의 접촉 표면을 늘리기 위한 행위였을 테다. 손에 쥘 수 없을 것만 같은 이미지의 표면에 접촉 가능한 물리적인 틈을 새겨 넣은 것이다. P21의 하얀 벽면으로 분사된 조형물의 흔적은 안태원의 작업이 이미지에 기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물을 향해 가고 있음을 재차 증명한다. 그리고 이렇듯 입체-조각-사물의 몸을 가진 평면-회화-이미지들은 인터넷을 통해 형성된 안태원의 혼종적인 정체성을 보여준다. 그는 디지털 이미지의 문법을 체화한 채로, 여전히 일종의 ‘사물’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작가이다.
다시, 고정된 ‘상태’가 아닌 특정한 ‘상황’에 놓인 작업으로서 그의 작업을 바라본다면, 더이상 회화냐 조각이냐, 평면이냐 입체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작업은 어쩌면 처음부터 사물에 뿌리 내린 이미지의 형상을 취해왔다. 그렇다면 이 다음에 그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몸은 어떠한 모양을 하고 있을까? 그의 작업 안에서 무한한 가변성을 지닌 이미지가 앞으로 어떤 몸을 갖게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모든 것을 다시금 ‘물질’로 바라보고자 하는 흐름 속에서, 그것이 어떤 기로에 놓이게 될지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1) 본 글에서 ‘이미지’란 현실의 상(像)을 모방하거나 재현, 기록한 것을 가리키는 한편 언어 및 물체(object)와 구분된 것을 칭한다.
2) 실제로 ‘밈(meme)’이라는 단어는 본래 유전자라는 뜻을 가진 ‘gene’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개념이었다.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는 자신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인간의 유전자와 같이 자기복제적 특징을 가지며 한 사람이나 집단에게 전해져 오는 모방 가능한 생각이나 믿음, 문화의 구조를 가리켜 ‘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