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우 개인전
«Big things have small beginnings»
전시 서문
2024.08.09 - 08.29
스페이스 카다로그
여기 작은 세계가 있다. 가설과 상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들을 최소한의 면적으로 일구어 놓은 세계. 파편적이지만 구체적인 형상을 빌려온, 먼 미래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쓴 오늘의 세계. 《Big Things have Small Beginnings》는 한경우가 공간의 규모로 구현해온 설치 작품의 작은 모형, 또는 아직 구현되지 못한 것들의 작은 시작을 한데 모은다. 달리 말해 그가 거쳐온/거쳐갈 작업의 흐름을 오늘과 내일의 시점에서 소급하여 바라본다. 그러나 이 축소된 세계를 이루는 것들은 과거의 어느 단계에 그치거나 현재의 상태에 속박되지 않은 고유의 작품으로 기능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작품을 포함한 – 개별 작품들은 한시적으로나마 같은 공간을 점유하며 ‘작은 시작’의 장소를, 세계를 구성한다. 이들을 무엇과 무엇을 대신하는 대상이 아닌 온전한 ‘작품’의 이름으로 부르는 까닭이다.
보기(seeing)를 보여주기
보다 오래된 과거에서 시작해보자. 주지하듯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망막에 맺힌 상을 감각하는 일과 다르다. 보는 것에는 항상 우리가 잘 알거나 모르는 것, 기대하거나 경험한 것들이 달라붙는다. 때문에 보는 행위란 개개인의 이해와 판단을 바탕으로 외부 세계를 해석하는 행위에 가깝다. 한경우는 이처럼 우리를 둘러싼 실제 세계와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 사이의 간극에 주목해왔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한들 시각(vision) 자체를 볼 수는 없으므로, 그는 ‘보기’를 보여주기로 했다.1) 작품은 시각과 시각에 기반한 현상을 가시화하고, 이를 비틀거나 일깨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가령 특정 시점에서만 유효한 형태의 조각을 만들거나, 시선의 변주에 따라 착시를 일으키는 이미지를 연출함으로써 보는 일의 실패를 거듭케 하는 식이다. 결과적으로 유도된 실패는 보기를 보여주는 일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다시 현재에 가까운 과거로부터, 한경우는 ‘보기’의 이면에 모종의 함의와 서사를 더하기 시작했다. 이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거리-시각-관계에 대한 숙고를 담은 <Distant relationship>(2024)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작품은 먼 관계, 즉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해진 시점에서 보아야 가까스로 읽을 수 있는 기호 – SUBSCRIBE – 를 문자화한다.2) 이때 문자는 “언어와 시각의 연결점”으로서 분명한 가독성을 지닌다.3) 한편 벽에 밀착된 밑면의 문자와 달리 뾰족하게 튀어나온 원뿔 모양의 바깥면은 오늘날 흔히 ‘구독’으로 맺어지는 관계의 양면성을 상징한다. 일견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 성립되는 듯한 구독의 관계가 실은 한정된 시야 내에서 특정한 메커니즘을 통해 우리 앞에 제시된다는 것. 이러한 사실을 수긍할 때, 현실은 보는 일과 마찬가지로 해독되어야 할 텍스트가 된다.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기 / 닿지 않기
이제 한경우의 가시적인 세계 안에서 ‘보기’란 말 그대로 눈을 통해 물질화된 세계를 가늠하는 행위에서 나아가 주어진 현실을 살피고 지나온 경험을 헤아리거나 어떠한 관계를 맺기에 이르는 넓은 용례를 포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범주의 확장은 시선의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시도로 이어졌다. 기존의 작품이 주체의 시점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고정된 대상’을 치밀하게 연출했다면, 근래의 작품은 가정된 상황 속 ‘변형된 대상’과 그로 하여금 다른 위치를 점하는 주체의 시선을 연출한다.
<Tip of the skies>(2024)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초고층 빌딩의 꼭대기 형태를 재현한 뒤 검은 수조에 담가 놓은 작품이다. 인간이 쌓아 올린 허영,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 있던 마천루(摩天樓)가 수면 아래 잠겨 버린 것이다.4) 이곳에서 우리는 늘 올려다봐야 했던 (혹은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보이지 않던) 고층 건물의 꼭대기를 자연스럽게 밑으로 내려다보게 된다. 어느 SF 소설 속 대지 아래 위치하는 하늘의 천장처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맞닿게 된 두 장소는 실재하는 세상의 이치를 전복시킨다.5)
건축물을 차용한 또 다른 작품 <Silent accademia>(2024)는 무수히 굴곡진 연둣빛의 흡음재로 뒤덮여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흡음재를 재현한 형식을 띠고 있다. 언뜻 보아 다른 곳으로 향하는 통로나 터널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사실 다비드 상이 놓여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의 구조를 본떠 만들어진 것이다. 한경우는 인류가 이룩한 문화적 가치가 담겨 있는 장소를 외부와 차단된 무향실(anechoic chamber)로 탈바꿈시킴로써 철저히 고립된 공간을 형성했다. 비워진 가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흠결 없는 고요일 뿐이다. 여기에 이르러 줄곧 작품에 드리워져 있던 ‘보기’의 문제는 타의 것과 결부되는 감각의 문제로 치환된다.
서로 다른 위치, 서로 다른 시간에 놓여있던 것들의 작은 세계는 이들을 성글게 엮어주던 ‘보기’에 관한 고찰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러 차이를 거쳐 도달한 곳에는 결국 봄으로써, 봄을 통해, 봄으로 인해 닿아 있거나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닿을 수 없는 땅과 하늘, 음과 양(<Middle way>(2024))은 인접한 것으로, 닿아 있다 여겼던 관계와 가치는 가까이 할 수 없거나 고립된 것으로 이곳에 현현한다. 그럼에도 이 자리바꿈은 어느 단계에 그치거나 지금의 상태에 속박되지 않을 것이기에, 또다른 시작으로 작용할 테다.
여기 작은 세계가 있다. 이 세계가 지나온 무수한 시작 속에서, 아직 시작되지 않은 이야기를 ‘본다’.
1) “시각(vision)은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보기(seeing)가 무엇인지를 볼(see) 수 없다는 것, 눈이라는 것이 결코 투명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나는 보기 자체를 보여주는 것, 보기를 전시하는 것, 그래서 보기를 분석이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W.J.T. 미첼,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 이미지의 삶과 사랑』, 김유경 역, 그린비, 2010, pp.483-4.
2) 문자란 언어 또는 말을 눈으로 읽을 수 있게 나타낸 기호를 의미한다. 즉 언어를 시각화 한 것으로서, 언어 자체와는 구별된다.
3) W.J.T. 미첼, 앞의 책, p.490.
4) 마천루는 하늘(天)을 문지르는(摩) 다락(樓), 즉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솟은 고층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언급된 최초의 마천루는 구약성서 창세기 11장에 등장했던 바벨탑이다.
5) 테드 창, 「바빌론의 탑」, 『당신 인생의 이야기』, 김상훈 역, 엘리, 2016, p.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