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서희개인전
«용기있는 자를 위한 셔츠»
용기(龍氣)를 향한 믿음과 용기(勇氣)로부터,
2025.3.20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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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십이지(十二支)에서 유일한 상상의 동물이다. 쥐, 소, 닭, 개, 돼지 등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십이지의 동물에 용이 포함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오늘날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설이 전해진다. 그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신성한 존재를 향한 고대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가설에 따르면 용은 십이지가 만들어진 당시 사람들에게 신화적 존재가 아닌 실재하는 동물로 여겨졌다. 하늘과 바다를 넘나들며 비와 바람을 다스리는, 신비롭고 상서로운 동물. 과거의 영예가 무색하게, 이제 용의 존재와 용을 둘러싼 전설에 대한 믿음은 허황된 상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설화 속 존재들이 으레 그렇듯, 용은 여전히 길하고 복된 무언가를 상징한다. 누군가에게는 아직 용(이라는 환상의 동물) 또는 용이 가져다 주는 강령한 기운이 유효할지도 모른다. 이때에 용과 용기(龍氣)는 단순한 공상에 머물지 않고, 현실의 삶 낱낱에 가까이 배어든다. 일종의 환상적인 가설처럼, 최서희의 개인전 《용기있는 자를 위한 셔츠》는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 실재하는 것들에 대한 모종의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최서희는 용의 해, 그러니까 ‘용띠 해’ 중에서도 60년에 한 번씩 돌아온다는 ‘황룡띠 해’에 태어났다. 이 단출한 사실만으로 그는 종종 근거 없는 용기를 얻곤 했다. 그에게 용의 기운이 실재하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타고난 ‘용의 기운’을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것으로 내미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한강의 인어’ 이야기처럼, 그는 터무니 없더라도 믿고 싶은 존재들의 조각을 주워 모았다.1) 이는 믿음의 대상을 직접 쫓기보다, 믿는 마음으로서의 ‘믿음’을 수집하는 일에 가까웠다. 언젠가 닥쳐올 불행에 대비하여 기를 모으듯, 최서희는 믿음과 믿음에서 기인한 용기(勇氣), 이를 지키기 위해 염원하는 마음을 모아 일상의 사물과 풍경에 투영한다. 그리고 이렇게 그러모은 장면을 반짝이는 그림으로 그려낸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셔츠의 라벨에 ‘바닷바람으로 만든 면’, ‘용의 발톱으로 만든 단추’와 같은 의미심장한 실마리를 새겨 넣거나(<용기 있는 자를 위한 셔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에 ‘주의: 용이 지나가는 구역’이라는 제목을 붙여 일상에 깃든 ‘기’를 암시한다(<CAUTION DRAGON CROSSING ZONE>). 그의 손에 의해 환상의 세계에 부유하던 것들은 한지와 수묵이라는 몸, 이미지라는 시각적 단서와 물리적인 실체를 획득한다. 하나의 화면 안에 덧붙인 환상과 수차례 배접한 한지로 쌓아 올린 믿음은 위기와 곤경에 맞서 싸울 검과 방패가 되어 준다.
일련의 작업 과정을 “존재의 수집”이라 부르는 최서희에게 그 기준이 되는 다른 축에는 어릴 적 보았던 미소년ㆍ소녀 전사물과 MTV 프로그램에 관한 기억이 있다.2) 특히 그가 즐겨 본 <캡틴 플래닛(Captain Planet and the Planeteers)>은 엠페도클레스(Empedocles)가 제시한 4원소 – 불, 물, 흙(땅), 공기 – 를 모티브 삼아,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과 이를 결합하고 해체하는 마음의 힘 – 사랑(philotes)과 불화(neikos) – 에 대해 이야기했다.3) 최서희는 <캡틴 플래닛>의 캐릭터들이 마법 반지를 통해 능력을 발휘하듯, 자신의 그림 안팎에도 장식적 요소를 부여한다. 주로 광택을 지닌 천과 비즈, 써지컬 스틸 등의 재료를 활용하는데, 이는 판타지 만화나 영화 속 주인공의 영험한 장신구를 닮은 모양으로 조형된다. <기(氣)를 위한 목걸이>, <기(氣)를 위한 귀걸이>, <기(氣)를 위한 반지>, <기(氣)를 위한 팔찌>와 같은 작은 크기의 개별 작업은 한 공간에 모임으로써 저마다의 힘을 지닌 상징적 도구로 기능한다. 나아가 현실로 소환되었던 환상과 신념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나아갈 포털을 열어준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힘, 달리 말해 이 모든 사물과 세계를 한데 엮는 믿음과 마음의 힘이다. 최서희의 작업에서 작동하는 힘은, 역설적이게도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서 솟아난다. 그는 얼마간 찾아 헤매었지만 지금껏 발견하지 못한 것, 미처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실현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일, 아직 그리지 않았기에 그려질 가망이 있는 그림에 일말의 여지를 남겨둔다. 세상에는 영영 몰라야만 오롯이 믿을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여지에는 부러 발 들이지 않고, 애써 경원함으로써 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의 자리가 있다. “나는 용의 해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최서희의 이야기 또한 정해진 결말을 유보하기로 한다. 몹시 고대하지만 가닿을 수 없는 그곳은, 끝내 도래하지 않음으로써 제 몫을 다할 것이다.
1) 최서희는 할머니가 한강에서 보았다는 인어와 ‘용의 기운’에서 기인한 근거 없는 용기를 한데 겹쳐 본다. 유년 시절 반복적으로 들었던 할머니의 “확신에 찬 목소리”는 다른 어떤 사실보다 생생한 증표가 되어 주었다. 최서희의 그림에서, 우리는 믿기 어렵거나 믿을 수 없는, 그러나 믿고 싶은 것에 대한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듣는다.
2) 이를테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방영되었던 <달의 요정 세일러문>, <카드캡터 체리>, <매직키드 마수리> 등이 있다. 80년대에 방송을 개시한 MTV는 ‘듣는’ 컨텐츠였던 음악을 ‘보는’ 것으로 전환시킨 음악 방송 전문 채널이다. 이러한 변화는 ‘MTV 세대’라는 용어를 탄생시킬 정도로 사회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작중 ‘대지의 여신’으로 등장하는 가이아는 불, 물, 흙(땅), 바람의 힘을 지닌 4명의 ‘플래니티어(Planeteers)’를 하나로 묶어주는 마음의 힘, 그리고 마음을 다루는 인물인 ‘마티(Ma-Ti)’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마티, 네 능력이 가장 중요하단다. 길을 밝혀 줄 마음의 힘이 없으면 다른 힘들은 쓸모없게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