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희ㆍ한정은
《Day & Night》
끝나지 않을 낮과 밤에게
2024.11.2 - 11.23
3Q
하얀 밤, 검은 낮. 지구의 자전축이 가리키는 맨 끝의 땅과 가까운 곳에서는 낮이 지속되는 여름과 밤이 지속되는 겨울을 보낸다. 백야와 극야로 불리는 이 현상은 서로 다른 반구에서 발생한다. 그러니까 북반구에 사는 몇몇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밤을 지새우는 동안, 남반구에 사는 누군가는 긴긴 낮을 누빈다. 서지희와 한정은은 시간이 곧 공간이 되는, 그림 위의 시공간(spacetime) 안에서 각자의 낮과 밤을 영속해왔다. 두 작가가 견지하는 ‘보기’의 방식은 삶의 부산물로 피어나는 정서를 주의 깊게 다스리는 태도와 결부되어 있다. 그 결과물로서 제시되는 그림은 낮과 밤이라는 특정한 시간의 형질을 띤 채 다른 빛과 형태로 다듬어졌다. 이렇듯 평행하게 흘러가던 두 사람의 시간은 한정된 기간 동안 마련된 이곳 – 《Day & Night》 – 에서 하나의 교차점, 하나의 사건(event)으로 포개어진다.1)
전시라는 사건을 벌이기에 앞서, 서지희와 한정은은 각자에게 익숙하지만 서로에게는 생경한 낮과 밤의 사진을 건넸다. 그리고 이를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진에는 없지만 시선에는 있는 시간의 파형을 담았다. 두 시선의 흔적은 깊이 남은 자국처럼 실재하는 풍경에 배어들어 또 다른 시간을 불러왔고, 여기 함께 놓였다. 전시는 내밀한 애착을 기반으로 관계하는 동시에 먼 간극을 지닌 두 사람-시간-그림을 한곳에 모아 두고, 그 사이에서 팽팽히 맞서다가도 느슨히 연결되기를 주저 않는 감각과 정서를 다룬다.
서지희에게 낮은 미동의 상태로 고요히 지속되는 시간이다. 그는 주어진 곳에서 맡은 바를 다하는 것들에 시선을 둔다. 이를테면 어김없이 지평선 위로 뜨는 해와 쓰임이 없을지라도 제자리를 지키는 사물, 자신의 일을 기꺼이 수행하는 사람들. 다가올 무언가를 위해 지금의 몫을 보살피는 존재들. 이들의 고유한 시간은 자연스레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것이기에, 언제나 곧은 자세를 요한다. 이 자세로 하여금 서지희는 밖으로 흩어지기 보다 내면으로 침잠하는 낮의 기운을 익혔다. 그는 흰 종이를 앞에 두고, 먼저 과잉된 세계의 불필요한 요소들을 하나 둘 소거한다. 그렇게 남겨진 형태와 색을 최소한으로 정제하여 또렷이 드러내고 난 뒤에는, 종이의 성긴 요철을 빼곡히 메꾼다. 색연필을 쥔 손은 정해진 면적의 종이 위를 숱하게 오가며 빛이 반사될 만큼 매끄럽고 고른 표면을 만들어낸다. 종이의 밀도가 마음의 밀도만큼 차오르고 나면, 비로소 낮의 고요는 지속된다. 서지희에게 이 과정은 마음을 가다듬고 돌보는 일과 다르지 않으므로, 고르게 퍼져 지면을 아우르는 빛은 드리워진 어둠과 바깥의 혼탁함 속에서도 매일의 안녕을 돕는다.
한정은에게 밤은 명멸하는 빛과 끝없는 어둠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빛은 어둠 안으로 침투하기보다 그 곁을 부유하는 무상한 존재다. ‘반짝’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잠깐 빛났다가 ‘사라지는 모양’임을 상기할 때, 밤은 짧게 머물다 물러가는 것들을 조명하는 정경이 되어준다. 유한한 것들의 끝을 쫓는 한정은의 시선은 덧없음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사라지는 중인 밤의 풍경은 그의 화폭에 어스름한 빛의 형태로 담긴다. 무릇 홀연히 떠나는 것들이 그렇듯 흐릿하고, 희미하고, 불명확한 모습으로. 반면 이들을 그려내는 과정은 분명한 무언가를 새기고, 쌓고, 더해가는 일에 가깝다. 한정은은 장지와 캔버스를 왕래하며 옅게, 또 두텁게 쌓아 올린 물감 층으로 여러 레이어의 풍경 속 아득한 감각을 체현한다. 이렇게 겹겹이 개어진 사사로운 감정은 돌아오지 않을 매 순간을 다시금 경험케 해준다.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응어리진 말들은 시의 형식으로 새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한정은에게 그림은 지나간 것들을 붙잡아 두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언젠가 사라지고 말 모든 것을 아낌없이 겹쳐본 뒤 더이상 닿을 수 없는 바깥으로, 캄캄한 밤의 시간 위로 띄워 보낸다. 더 잘 떠나 보내기 위해 그려진 그의 그림은 밤의 빛처럼 반짝이는 작별을 고한다.
서지희와 한정은에게, 《Day & Night》은 낯선 시간과 풍경으로 서로를 데려다 놓고 마음껏 방황할 수 있는 틈을 마련해주었다. 이곳에서 서지희의 낮과 한정은의 밤은 반대 지점을 향해 있음에도 반목하지 않고 서로의 시간을 지탱한다. 한 사람에게 부재한 시간을 다른 한 사람이 채우는 식으로, 부족한 마음을 보태며. 어둠이 빨리 찾아오고 늦게 물러가는 이 계절의 짧은 사건은 기나긴 관계의 끈 위에 하나의 점으로 남을 테다. 이제 두 사람은 전시라는 교차점을 지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겠지만, 헤매어 도착한 어떤 시간과 어떤 공간에서 늘 그렇듯 멀고도 가까운 관계를 이어갈 것이다.
1) 물리학에서, 시공간(spacetime)은 3차원 공간에 1차원의 시간이 더해진 4차원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따로 다뤄질 수 없으며, ‘어떤 시간’과 ‘어떤 공간’은 4차원 시공간 안에서 하나의 좌표를 가진 사건(event)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