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 개인전
«캔버스에 바퀴를 달고 싶어»
바퀴 달린 그림을 위한 각주: 우리와 우리 모두의 어린이에게
2025.04.24 - 05.11
시청각 랩 (AVP lab)

추위가 더디게 물러난 올해 4월엔 눈이 내렸다. 보기 드문 봄눈의 생경함도 잠시, 어김없이 꽃은 피었다. 늦된 봄의 시차 속에 활짝 핀 꽃은, 문득 너무 조용히 찾아와서 미처 알아채기 어려운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슬며시 가까워지는 마음과 표표히 흘러가는 감정, 무료한 일상에 깃드는 미세한 변화는 올해의 봄처럼 늦되게 깨우치기 마련이다. 고여 있지 않고 흐르기에, 멈춰 있지 않고 변하기에 덧없는 현재는 같은 이유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날씨부터 매년 조금씩 다른 주기로 돌아오는 계절, 커다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영그는 움직임을 감지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지금을 살아간다. 이은의 네 번째 개인전 《캔버스에 바퀴를 달고 싶어》는 이처럼 현재를 감각케 하는 동인으로써 ‘움직임’을 다룬다. 바퀴 달린 캔버스의 움직임은 전시장을 오고 가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은은 만남이라는 사소한 사건이 펼쳐지기를 기다리고 지켜보며, 다시 돌아온, 돌아오지 않을 오늘의 봄을 충만하게 감각한다.
움직임을 꿈꾸며
그간 이은의 회화에서 움직임은 작업 외부의 조건이 아닌 내적인 구조로 작동해왔다. 그림에 등장하는 해묵은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들은, 그 자체로 특정한 움직임을 가시화했다. 흑백 필름에서 컬러 영화와 텔레비전을 거쳐 스마트폰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초월해 살아남은 이들은 서로 다른 유년 시절을 보낸 여러 세대에게 비슷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은은 공통의 과거를 품은 듯한 착각을 자아내는 캐릭터에서, 지난 시대가 투영한 미래의 현재를 보았다. 그리고 현재와 맞닿은 채 시간에 몸을 실은 유동적인 존재로 그들을 소환했다. 이는 캐릭터가 담지하는 빛 바랜 유토피아적 꿈을 현재에 재생시키는 일이기도 했다.1)
이은의 그림에서 낡은 것이 새로운 것과 만나 빚어내는 경험은 시각적 몽상에 가까운 형태로 주어진다. 분명 특수한 과거를 환기하지만 하나의 시절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의 기억에 안착하는 몽상-그림은, 현실의 장막 위로 겹겹이 포개어진 감각의 결을 더한다. 이번 전시에서 이은은 꿈의 조각들을 동력 삼아 어렴풋이 상상하던 세계를 충실히 구현했다. 벽면에서 내려와 전시장 곳곳에 자리 잡은 그림들은 잠재된 움직임의 가능성을 품고 바퀴를 굴리기 시작한다.
도래할 현재
무구한 눈으로 들어온 이곳에는 캔버스뿐 아니라 친숙한 얼굴의 장난감, 일상의 사물을 지지체로 삼은 그림들이 있다. 그림이 올라서 있는 크고 작은 바퀴는 회화의 물성을 실험하기 위한 자기-지시적 작업이 아닌 “말 그대로 움직이는 것, 늘 변하는 중”이며 서로 울림을 주고받는 사물을 만들기 위해 고안된 장치이다.2) 전자가 이미 완결된 체계 내에서 홀로 작동하는 그림이라면, 후자는 관객이라는 주체의 개입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그림을 가리킨다. 납작한 정물(still life)이 아닌 생동하는 사물의 모습으로 여기 놓인 그림들은 관객과 마주하고 몸을 부딪힐 때 비로소 진정한 존재감을 갖는다. “마치 종소리처럼, 어떤 충격이 가해졌을 때” 일어나는 “반향(resonance)으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3) 바로 이 지점에서, 이은이 포착하고자 하는 유일무이한 만남과 사건, 움직임의 감각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일련의 사건을 관찰함으로써 이은이 닿고자 하는 곳은 어디일까? 어린이용 오디오 가이드로 비치된 사운드 작업에 또다른 단서가 있다. 화자로 등장하는 벌새는 날갯짓만으로 제자리에 멈춰서도 추락하지 않고 날 수 있는 유일한 새이다. 벌새는 말한다: “우리는 사실 모두 다 겁쟁이”지만, 그건 이상한 게 아니라고. “단단히 곤란한 일”이 닥치더라도 오늘 “우리가 여기서 만났다는 것”을 기억해달라고.4) 이 상냥한 목소리에서, 우리는 과거의 나를 돌보는 현재의 나를 만난다. 이은이 갖은 방법으로 현재를 감각하고자 애쓰는 까닭 또한 여기에 있다. 그는 쉽게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바퀴 달린 캔버스에서 지금-여기를 딛고 서 있는 자신의 몸짓을 본다. 나아가 바퀴를 굴리는 관객의 발걸음에서 자신을 찾아왔던 존재들 – 이미 떠났거나 여전히 곁에 있는, 사랑하거나 미워했던 존재들 – 을 본다.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 끝에 이은이 도착한 곳에는, 결국 몇 번이고 되풀이해도 다시 도래할 최선의 현재가 있다.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와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5) ‘어린이 혹은 마음속의 어린이’를 관객으로 상정한 전시는 짐짓 진부하더라도 서로를 연결하는 말들로 쓰인 서신의 형식을 택했다. 마음이 위태로울 때 두고두고 읽고 싶은 이 전시에,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인사말을 덧붙인다.
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Si vales bene, valeo). 당신이 잘 있다면, 나도 잘 있습니다.6)
1) 벤야민은 ‘미키 마우스’라는 캐릭터를, 옛것과 새것이 얽혀 있는 일종의 ‘소망 이미지’로 설명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미키 마우스는 복잡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합적 의식 속에서, 가장 단순하고도 편리한 방식으로 유토피아를 산출하는 꿈의 산물이다. 발터 벤야민, 「경험과 빈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옮김(서울: 도서출판 길, 2008), 179 참조.
2) 이 글에서 언급하는 움직임의 감각은 문화인류학자 캐슬린 스튜어트가 말하는 ‘일상적 정동(ordinary effects)’의 개념에 빚지고 있다. 그는 일상에 깃든 정동의 힘을 “말 그대로 움직이는 것, 늘 변하는 중이며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일상적 정동은 “힘을 가지는 어떤 종류의 격동, 마찰, 관계”이며, 이는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거나 개인에 우선한다.” 캐슬린 스튜어트, 『투명한 힘』, 신해경 옮김(서울: 밤의책), 2022, 18, 279.
3) 같은 책, 12.
4) 오디오에는 벌새의 음성과 함께 이은이 직접 녹음한 폴리 사운드(foley sound)가 흘러나온다. 몸과 사물, 사물과 사물 간의 마찰로 발생하는 소리를 상상하고 만드는 행위는, 그가 머무는 지금-여기에 보다 집중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5) 영화 <벌새>(2019)의 마지막 시퀀스에 흘러나오는 이 대사는 극중 어른인 ‘영지’가 중학생 ‘은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속 문장이다.
6) Pliny the Younger, Epistulae, I. 11.